상호 존중을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The Odyssey”는 약 2,800년 전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서사시를 영화로 옮긴 작품입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이야기와 작품에 영향을 미치며 서양 문학의 토대를 놓은 고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란은 이 거대한 이야기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영화에서 ‘Zeus’s law’, 제우스의 법이라고 부르는 고대 그리스의 환대 규범 ‘Xenia’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낯선 나그네가 집을 찾아오면 먼저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고, 손님 역시 주인을 존중해야 했습니다. 초라한 나그네가 사실은 신이 변장한 모습일 수도 있다는 믿음도 그 배경에 있었습니다. 놀란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원리를 “내가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즉 상호 존중(Mutual Respect)으로 설명합니다. 서로를 존중한다는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낯선 곳을 여행하고, 거래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The Odyssey”에서는 이 환대의 법이 무너질 때 관계와 신뢰도 함께 무너지고 결국 폭력과 복수가 뒤따릅니다. 누군가 상대의 환대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는 순간 공동체의 질서도 흔들립니다. 수천 년 전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있는가?”
존중은 모든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견은 반대하면서도 사람을 모욕하지 않고,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의 존엄성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을 ‘내 편’과 ‘반대편’으로 나누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생각이 같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놀란이 설명한 Zeus’s law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존중하고, 배려받고 싶다면 먼저 배려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이 원리가 무너지면 오래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눅 6:27) 상호 존중은 서로의 존중을 전제로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의 반응을 조건으로 삼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사랑한다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경계를 넘어가라고 하십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 앞에 서 있는 초라한 나그네가 혹시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 역시 낯선 이를 환대하라고 가르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그러나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나그네가 혹시 신일지 몰라 환대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그 사람이 누구이든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부자라서도,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어서도, 언젠가 은혜를 갚을 사람이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을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지를 드러내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나그네’는 누구일까요? 처음 이민 온 사람, 영어가 서툰 사람, 직장에서 인기가 없는 동료,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 문화와 세대가 다른 사람, 심지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낯선 사람에게 냉정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는 예의 바르면서 힘없는 사람에게는 무례하지는 않습니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라인에서 사람을 너무 쉽게 조롱하고 공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면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The Odyssey”가 수천 년 전의 환대의 법을 다시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놀란은 상호 존중이 문명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하고 싶습니다.
상호 존중이 문명을 지탱한다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크리스천의 기준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면 저 사람을 어떻게 대하실까?”입니다. 존중받기 전에 존중하고, 환영받기 전에 환영하고, 사랑받기 전에 사랑하는 것, 심지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까지 품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입니다.
오늘 당신의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의 질문이 들려오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는 나를 어떻게 대했느냐?
그 질문 앞에 말이 아니라 삶으로 대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도합니다.
글 : 김도윤
골드코스트 이민가족교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