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베란다를 가득 채우지만, 어깨 끝은 서늘하고 몸은 자꾸만 움츠러든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을 느낄 때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 탓이라며 스스로 달래보지만, 결국 마음 한편에서는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구나” 하는 담담한 인정에 이르게 된다. 마음은 아직도 팽팽한 현처럼 생기를 머금고 있는데, 몸은 그 속도를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이 문득 서글퍼진다. 어쩌면 자연의 이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내 곁의 작은 풍경들 속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목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싶다.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 창가에 오래 머무는 햇살, 무심한 안부 한마디에도 마음이 환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소소한 충만함이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된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눈가에 번져가는 잔주름과 이마 한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진 두 줄을 바라보며, 연륜의 깊이보다 먼저 스쳐 가는 것은 왠지 모를 쓸쓸함이다. 어느새 나는 세월의 흔적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는 평범한 여자가 되어있다. 로맹 가리의《여자의 빛》 중에서 이런 대화가 나온다.
“그런데 내가 늙어서 예순 살이 되면?”
“당신 말은 배, 가슴, 엉덩이 같은 게 늙는 걸 말하는 거야?”
“물론 그렇지. 그런 생각을 하면 겁나지. 안 그래?”
“아니 겁 안 나.”
“어떻게 겁이 안 날 수가 있어? 내 피부가 늙은 피부가 되는데?”
“늙은 피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건 사랑이 없을 때의 이야기야.”
‘우리에게는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고, 연민과 사랑을 베풀 권리가 있다.’라는 책의 글귀를 새삼 떠올리며 동년배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고 싶다. 결국,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자신을 품어주는 다정함인지도 모르겠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내느냐에 따라 삶의 온도는 달라질 수 있기에.
유엔(UN)에서 인간의 연령 기준을 새롭게 정립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백 세를 살아가는 이들이 더는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면서, 나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분류에 따르면 1세부터 17세까지는 미성년 기, 18세에서 65세까지는 청년기, 66세에서 79세까지는 중년기, 80세에서 99세까지는 노년기이며, 100세 이상은 장수자로 정의된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환갑만 되어도 노년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예순을 넘어도 여전히 청춘의 범주 안에 머무는 셈이다. 이런 계산법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 기사를 읽으며 괜스레 웃음이 났다. 세상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더 많이 웃고, 더 멀리 여행하고, 더 자유롭게 살아보라고 등을 떠민다. 물론 세월의 무게를 완전히 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스스로 늙게 하지 않을 자유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얼마 전에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프랑스의 한 은퇴자가 오십여 년 전 젊은 시절 근무했던 시에라리온의 한 학교를 다시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오래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공간을 다시 마주한 그는, 그곳에서 지나온 삶의 의미와 따뜻한 흔적들을 발견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아마도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성공보다, 자신의 시간 속에 남겨진 진심들을 다시 돌아보며 더 큰 위로를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카톡으로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 시절의 단짝 친구와 속 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친구의 말투와 웃음소리는 여전히 그 시절의 온도를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는 흰머리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는데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금세 교복을 입은 십 대 소녀의 수다 시절로 돌아간다. 그 시간만큼은 세월도 잠시 길을 잃는 모양이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가벼운 안부 끝에 돌아온 친구의 대답은 뜻밖에도 유쾌했다. 정년으로 퇴임한 남편과 둘이서 “돈 쓰는 재미로 산다”라며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도 환하게 번져왔다. 특별히 할 일은 없어서 가끔은 천장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지만, 퇴임한 또래 부부들을 만나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이름난 맛집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남편 덕에 “팔자가 늘어졌다”라며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참 좋았다. 삶이란 결국 마음의 방향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는 것임을, 친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치열함도 지나가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없던 시간도 흘러간 뒤에 남는 것은 어쩌면 이런 느긋한 웃음인지도 모른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나이 들어가는 시간을 초라함이 아니라 여유로 살아내는 태도 말이다.
지난 삶을 직선처럼 쉼 없이 달려왔든, 때로는 곡선을 그리며 돌아왔든 간에 우리 앞에는 아직도 잠시 멈춰 서야 할 수많은 임시 정류장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남의 시선에 지나치게 흔들리지 말고, 나이라는 숫자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이 무엇인지 천천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이런 상상도 해본다. 오늘 하루 나는 얼마나 많이 웃으며 지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작은 미소를 건넸는지를 가만히 재어볼 수 있는 ‘행복지수 측정계’ 같은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누군가 잠시 기대어 쉬어 갈 수 있는 정거장, 서로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작은 쉼터 하나쯤 우리 곁에 만들어 두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질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머물고 싶어지는 삶의 정거장을 서로의 마음속에 하나씩 세워보는 것이다.
행복이 오래 머무는 사랑이란 단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이와 넓이, 순수함과 지속성, 그리고 진심 어린 표현이 함께할 때 완성된다고 한다. 자신의 마음을 맑게 다듬고, 타인을 향해 빛을 비추며, 너그러움을 품고 살아간다면 생각 또한 자연스럽게 긍정으로 흐르게 된다. 결국, 선한 마음은 조용하지만 단단한 힘으로 악을 이겨낸다는 삶의 진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서로를 쉽게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가고, 관계는 단절과 고립 속으로 숨어드는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나눔의 힘을 믿고 싶어진다. 작은 온기라도 기꺼이 나누고 또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결국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보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고 난 뒤, 나는 한동안 그 여운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공책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움켜쥔 두 손을 천천히 펼치고 마음을 비운다면, 그 빈자리에서 납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의 비밀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라고.
삶의 진정한 보물은 결국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를 조금씩 정화해 가고, 삶을 향한 단단한 의지를 회복해 나갈 때 비로소 그것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때로는 꼭 쥐고 있던 욕심을 내려놓고, 누구에게나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마음의 정거장’을 마련해 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내 삶의 연금술사가 되어, 일상의 무게를 조금씩 다른 빛으로 바꾸어 가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글 : 황현숙 (칼럼니스트)






